2010년 9월 23일 목요일

이미 소를 잃었더라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

9월 21일 추석연휴 첫 날, 비가 오는 가운데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아가씨를 만나 점심을 함께 하기 위해 홍대입구역으로 갔습니다. 분명 약속을 잡을 때는 비온다는 말이 없었는데 억수로 쏟아지더군요.
약속한 사람과 만났을 때는 이미 홍대지하철역 입구가 물바다가 돼서 지날 수 없는 상황이라 지하철역과 연결된 건물을 통해 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비가 너무 세차게 오니까 신발과 옷이 순식간에 젖더군요.
더욱 웃긴 것은 멀리 갈 수 없어서 가까운 중국집에 들어갔는데, 그 집도 빗물이 새더라는 것입니다. 나름 2층에 있는 약간 고급스러운 집이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가방이 젖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국 빗물 때문에 밖으로 나왔습니다.
한잔의 룰루랄라라는 커피집을 가려는데, 롯데시네마 건물 뒤에서는 맨홀 뚜껑이 역류하는 물로 들썩거려고 "한잔의 룰루랄라"는 영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선택인 "커피와 사람들" 역시 문을 열지 않아서 간신히 맞은 편에 있는 커피집에 들어갔습니다.
나름 즐거운 대화를 나누다 6시경이 되어서 각자 헤어지기로 하고 밖을 나왔는데, 이상한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아가씨의 구두굽이 부러진 것입니다. 그래도 걷는 데는 지장이 없어서 일단 홍대입구역으로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역이 침수되어 지하철이 서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택시를 타고 합정역으로 갔습니다. 여기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아가씨가 지갑을 분실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지갑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으니 저에게 귀가할 차비까지 빌려야 할 형편이 된 아가씨의 체면이 완전히 구겨지게 된 것입니다.
그날 점심값과 커피값을 제가 계산했다고 아가씨가 택시비를 내다가 지갑을 떨어뜨린 것 같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저도 참 난감했습니다. 먼저 차에서 내려 지갑을 챙기는지 잘 봐주었어야 하는데, 비가 오니 우산을 쓰느라 뒤를 돌아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나름 그 아가씨보다는 어른이고 장교출신이며 남자인 제가 아가씨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지만,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소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보통 그것은 약간 비웃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는데, 현실은 소를 잃은 다음이라도 외양간을 고쳐야 더 큰 피해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생각해 보니 그날은 정말 평상시처럼 행동해서는 안 될 이유가 여러 가지 있었습니다. 지하철역이 침수됐고 식당에서는 빗물이 샜습니다. 맨홀 뚜껑도 튀어오를 것처럼 들석거렸죠. 이런 때에는 분명 평소와 다른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예측을 미리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자책해 봅니다. 사실 홍대입구역에서 지하철을 탈 수 없다고 했을 때,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습니다. 아가씨는 바로 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디를 들린다고 해서 계속 2호선을 타기 위해 택시를 타고 합정역으로 갔지만, 원래 여기서는 아가씨를 설득해 그냥 집으로 들어가게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해봅니다.
그날 저와 함께 했던 아가씨는 물에 젖고 구두가 망가졌으며 지갑을 잃었습니다. 소를 잃은 다음 외양간을 고치면 적어도 지갑을 잃는 사태를 방지할 수는 있었던 것이 아닌지 뒤늦게 후회해 봅니다.
네, 이미 소를 잃었더라도 외양간은 고쳐야 합니다.